■ 그 재판관의 퇴임
애타는 기다림에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3월 29일)]
"즉각 파면, 헌재의 결단 촉구한다! <촉구한다! 촉구한다! 촉구한다!>"
재판관을 향한 협박에도,
[유튜브 '전광훈TV' (3월 1일)]
"'밟아송'을 하겠습니다. 문형배를 밟아! <밟아! 밟아! 밟아!> 이미선을 밟아! <밟아! 밟아! 밟아!>"
평의를 둘러싼 잘못된 뉴스에도, 묵묵히 논의를 이어가던 헌법재판관들.
그리고 그날,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탄핵심판 선고, 4월 4일)]
"지금부터 2024헌나8 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에 대한 선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 한 마디 한 마디엔 추운 겨울 광장을 지켰던 시민들에겐 따뜻한 위안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짓밟은 이들에겐 죽비 같은 단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탄핵심판 선고, 4월 4일)]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윤 전 대통령)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마침내 이른 '전원 일치' 파면 선고.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탄핵심판 선고, 4월 4일)]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동료를 향한 작은 토닥임엔 4개월의 시간이 담겨있는듯 했습니다.
그리고 2주 뒤, 역사에 남을 심판을 맡은 8명의 재판관 중 2명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선/당시 헌법재판관]
"이제 헌법재판소를 떠나면서 제가 헌법재판소의 구성원이었음을 여러분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을 약속드립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저는 이제 시민으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헌법재판소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종욱 ▶
다시는 있어선 안 될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때 의심의 눈초리도 받았지만,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는 역사적 소임에 충실했습니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에 대한 파면.
그 결정은 어떻게 내려졌을까.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 선고문에 담긴 것
퇴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문형배 재판관이 오랜만에 재판정 밖으로 외출을 했습니다.
예비 법률가를 위한 비공개 강연.
그는 먼저 끊임없이 배우고 성찰해 독단과 편견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저 자신을 포함해서 판사를 오래 하면, 저는 당연히 '너를 심판할 권한이 있다', 그리고 '나는 되게 똑똑하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근데 판사도 보통 사람과 똑같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그걸 깨닫는 게 중요해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학생 (4월 17일)]
"가장 첨예하게 의견이 갈렸던 부분에 있어서 재판관님께서 소통을 통해서 의견 합치를 좀 이끌어내신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앞에 질문은 제가 답변하는 게 제한이 있으니까 이렇게만 말할게요. 만장일치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결국 '무엇이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기준은 관용과 자제였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탄핵 소추 권한은 야당의 권한이다, 국회의 권한이다, 문제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럼 우리는 질문을 합니다. 비상계엄은 대통령 권한 아닙니까? 거기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관용과 자제를 뛰어넘었냐, 뛰어넘지 않았느냐, 현재까지는 탄핵소추는 그걸 넘지 않았고, 비상계엄은 넘었다. 그게 우리 판단이에요. 그걸 이야기 한 겁니다. 관용과 자제, 정치의 문제는 정치로 풀어라.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한 거예요."
결론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이 사건은 만장일치를 위해서 토론을 하면 제 개인적으로는 결론은 현재에 이른다는 게 저희 처음 생각이었어요. 다만 어떤 그걸 받아들이는 데는 사람마다 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은 급한 사람이 늦은 사람을 기다려야지 늦은 사람이 급한 사람을 어떻게 기다리냐, 저는 그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정치의 실종과 극단적 대립에 대한 고민도 고스란히 선고문에 담으려 했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야당이 여당이 되고 여당이 야당이 될 텐데 우리가 생각하는 통합은 뭐냐 하면 야당에게 적용되는 권리가 여당에게도 적용돼야 되고 여당에게 인정돼야 되는 절제가 야당에게도 인정이 돼야 그게 통합이지 나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너희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다른 그게 어떻게 통합이 되겠어요? 그 통합을 우리가 좀 호소해 보자. 그게 탄핵 선고문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시간이 많이 걸렸고요."
헌법재판관을 향한 인신공격과 집 앞까지 찾아온 조롱과 욕설까지 감당해야 했던 시간.
그렇지만 자신의 삶은 여러 사람에게 빚지고 있다며,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도 담담히 털어놨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4월 17일)]
"83년도 학번들은 일상적으로 시위가 있었어요. 권위주의 정부였고. 그래서 제가 그때 서클에 들어가니까 선배들이 시위에 나가자고 그랬어요. 저는 못 나갔어요. 여러 가지 이유로. 제가 사법시험도 일찍 합격했고 그 다음에 아까 말한 지역 법관이 되면서 그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든 민주주의에 의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하겠다. 조금씩 조금씩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그게 지금까지 버틴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말한 '빚'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스트레이트는 지나온 그의 삶을 들여다봤습니다.
경남 하동군 이명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
문 재판관은 소작농의 장남이었습니다.
[문성식/모성마을 주민]
"공부를 참 잘했어요. 머리가 좋아가지고. 근데 공부를 잘 했는데 이제 형편이 어려워가지고…"
45년 전, 중학교 졸업 사진.
소년이 입은 교복엔 문형배가 아닌 다른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2019년 4월 9일)]
"낡은 교복과 교과서일망정 물려받을 친척이 있어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성한 옷 한 벌 입어본 적 없던 결핍의 기억.
그는 돈과 출세로 결핍을 채우기보다, 타인의 결핍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길을 바라봤습니다.
[윤환식/문형배 전 헌법재판관 친구]
"아버지가 지주로부터 당하는 그런 어려움을 갖다가 느끼면서 '약자의 편에 서가지고 계속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부분들이 법관의 길을 가는..."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고시 합격.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하던 시대에 이른바 법조 엘리트 코스를 밟을 수도 있었지만, 판사 경력 전부를 지역 법관, 소위 '향판'으로 남았습니다.
[이혁/변호사 (부산지방법원 등 함께 근무)]
"(헌법)재판관이 되시기 전까지 끝까지 부산, 창원에만 계셨죠. 법관이 승진이라든가 지리를 탐내게 되면 서울에 가야 되거든요. 서울 재판연구관이나 법원행정처 등의 요직, 소위 말하는 요직에 근무해야 되는데 '그러면 소신 있는 재판에 방해가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20년 전, 창원지방법원을 출입하면서 판사 문형배를 알게 된 김훤주 전 기자.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헌법재판관 퇴임식, 4월 18일)]
"저에 관해서 가장 많은 글을 쓴, 그리고 저보다 더 제 자신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김훤주 선생..."
고위 공직자의 부정부패 재판에서 예외 없이 철퇴를 내리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김훤주/전 경남도민일보 기자]
"'3.15 의거 그 다음에 거기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김주열 열사. 이런 민주 성지의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마산에서 선거 부정이 다시 일어났다는 건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저는 판결문에서도 그렇고 법정에서도 그렇고 이런 말들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뇌물을 받은 군수를 구속하면서는 '청렴은 목민관의 근본 의무로 온갖 착함의 근원이며 모든 덕행의 뿌리'라는 목민심서의 글귀를 인용해 꾸짖기도 했습니다.
[김훤주/전 경남도민일보 기자]
"'부패의 결과로 어떤 피해가 벌어졌을 때는 시면 시, 군이면 군, 아니면 나라면 나라, 이런 식으로 전체 구성원한테 그 피해가 돌아간다.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좀 차별을 지어야 한다' 이런 말씀을.."
반면 딱한 사정이 있는 이들에게는 달랐습니다.
카드 빚 때문에 삶을 포기하려고 묵고 있던 여관에 불을 질러 구속된 피고인에게 법정에서 '자살'을 10번 외쳐 보라고 한 재판장이 바로 문형배 판사였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인하대 강연, 4월 17일)]
"그럼 어떻게 되냐면 '자, 살자 살자 살자'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책을 줬고 책이 아마 <살아있는 동안 해야 될 49가지>인가. 그 책인가 그래요."
본드 흡입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20대에겐 벌금형으로 감형을 해주면서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마시멜로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문형배/당시 창원지방법원 부장판사 (경남MBC 뉴스데스크, 2006년 7월 16일)]
"피고인의 잘못을 저지른 그 원인. 원인 되는 사정에 공감을 표시함으로써 피고인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김훤주/전 경남도민일보 기자]
"'보잘 것 없는 사람들한테 대해서 이렇게 훌륭한 판결을 하시느냐' 이랬더니, '사람은요. 자기가 놓여 있는 환경이나 조건을 다 떼놓고 보면은요. 보잘것없는 사람도 없고, 굉장히 훌륭한 사람도 없습니다. 재판을 해보니까 그렇더라...'"
◀ 박종욱 ▶
'민주주의에 기여하겠다.'
'강한 자에겐 강하게, 약한 자에겐 약하게.'
판사로서 30년 넘는 세월 동안 이런 원칙을 지켜온 원동력은 어디서 왔을까.
여기엔 '김장하'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 어른을 따라,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2019년 4월 9일)]
"저는 사실 김장하 선생이 안 계셨더라면 저는 판사가 못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살아가는 것은 그분 말씀을 실천하는 것, 그것을 유일한 잣대로 저는 살아왔습니다."
'어른, 김장하.'
가난한 집안에서 중학교만 겨우 마치고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18살 무렵 한약방을 차렸습니다.
'돈이라는 게 똥하고 똑같아서 모아 놓으면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
차 한 대 없이 평생을, 해진 옷을 입고 닳고 닳은 구두로 다니면서,
"아니, 선생님 이렇게 될 때까지 입으시면... 안에 속지가 다 해졌어요."
벌어들인 돈은 아낌없이 사회에 양분으로 내놨습니다.
문화, 환경, 역사, 여성, 예술‥.
경남 진주에서 어느 한 분야 김장하 선생에게 도움받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홍창신/전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가난한,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돈으로 내가 호의호식할 수는 없다. 나누어야 마땅하다' 이런 것들은 실제로 그분이 해오신 것이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았고..."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면서도, 자신의 선행이 드러나는 건 극도로 꺼려왔습니다.
오히려 선행을 알리려 애쓴 이들은 '김장하' 장학생들이었습니다.
[김주완/어른 김장하 취재기 <줬으면 그만이지> 저자]
"다큐나 책이 이렇게 화제가 되고 나면 그 분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어디선가 이야기가 들어오거나 제보가 들어오거나 이런 게 분명히 있을 법도 한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게 없었거든요. 오히려 '아, 나도 김장하 선생님한테 이런 도움을 받았는데 왜 그 책에 제 이야기는 안 실어주셨습니까', '저한테는 왜 취재를 안 왔습니까' 이런 연락은 많이 받아왔지만..."
생물학에 널리 쓰이는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유전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이준호 교수도 그중 한 명입니다.
[이준호/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후배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어른 김장하>를 보고서 '선배가 그래서 그랬나?' 이런 이야기를 다행히 해주는 사람들이 좀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다행이죠."
이 교수는 윤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있어야 연구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사회의 혜택을 받은 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건 당연한 책무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준호/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그런 생각에 선생님이 영향을 끼치신…> 당연히, 당연히 있다고 봐야죠. 직접적으로 선생님이 뭔가를 하라든지 이런 걸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으세요.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뭘 해도."
이처럼 김장하 선생이 학생들에게 원한 건 거창한 게 아니었기에 오히려 특별했습니다.
지난 2016년, 약 20년 만에 부활한 '양심 냉장고' 프로그램.
도로에 아무도 없는 깊은 밤에도 정지선을 지킨 한 남성이 나타났습니다.
[이경규가 간다]
"<아무도 안지나갔는데 서 계시더라고요.> 빨간불이었으니까요."
[김종명/김장하 장학생]
"이야기가 자랑 같기도 한데 제가 MBC에서요. 양심냉장고를 받았어요. 그런 원칙을 세우고 좀 지키자, 그런 사소한 것부터 좀 지켜나가자."
사소한 원칙부터 지키는 삶을 산 김종명 씨도 '김장하' 장학생이었습니다.
60년간 운영하던 한약방의 문을 닫는 날 그를 찾아가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김종명/김장하 장학생]
"만약에 여기가 문을 닫으면 인사를 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김장하 선생은 오히려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는 거라고 답했습니다.
[김장하]
"'제가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돼서 죄송합니다' 내가 그런 거를 바란 거는 아니었어.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
[김종명/김장하 장학생]
"저한테 이제 그 이야기를 해주신 거지 않습니까. 저도 이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생각대로 모든 게 다 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그런 이야기를 또 해주시니까 많이 위안이 되더라고요."
역시 김장하 선생의 지원 덕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문 전 재판관.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제가 김장하 선생님 보도하는데 제가 끼고 싶지가 않아요. 그분은 그분 자체로 훌륭한 분이지, 제가 그분을 칭송했기 때문에 훌륭한 게 아니에요. 그걸 자꾸 착각하시는데, 재판관이 고맙다고 해서 (그분이) 훌륭해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선생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법대생 문형배에게 "갚아야 할 게 있다면 자신이 아니라 사회에 갚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문형배 (김장하 선생님 생일잔치, 2019년 1월 16일)]
"김장하 선생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갔더니 '자기한테 고마워 할 필요는 없고 자신은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할…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제가 조금의 기여를 한 게… 있다면 그 말씀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 젊은 판사는 평균인의 삶을 벗어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백혜련/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사청문회, 2019년 4월 9일)]
"헌법재판관들 기본 평균 재산이 제가 보니까 한 20억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후보자 재산을 보니까 6억 7,545만 원이에요."
[문형배/당시 헌법재판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2019년 4월 9일)]
"제가 결혼할 때 다짐한 게 있습니다.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최근 통계를 봤는데 평균 재산이 가구당 한 3억 남짓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재산은 한 4억 조금 못 되는데요. 평균 재산을 좀 넘어선 것 같아서 제가 좀 반성하고 있습니다."
여야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였지만, 문형배 재판관 임명에는 이례적으로 잡음이 없었습니다.
[최강욱/문형배 재판관 임명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상대적으로 재산도 너무 적고 특별히 뭘 검증 과정에서 짚어봐야 할 만한 포인트들이 발견되지가 않아서, 그전에 그렇게 시비를 붙으려고 했던 사람들조차도 별다른 시빗거리를 남기지 않는 아주 좋은 공직 생활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이 평균인의 삶을 벗어나지 않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한 법률가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이 사회를 지탱한다는 김장하 선생의 생각과 닮았습니다.
[문형배/당시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인하대 강연, 4월 17일)]
"평균인의 삶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제 생각은, <법의 정신>에 보면 그렇게 나와요. '피고와 같은 계급의 재판관을 정해야 된다' 그런 구절이 나와요. 다시 말하면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다 이런 세계에 사는데 재판관이 이런 세계에 산다고 할 때, 그 재판이 무슨 설득력이 있겠어요."
지금 우리가 이토록 '어른'에 반색하는 건, 특별한 누군가가 아닌 평범한 '우리'가 켜켜이 쌓아 올린 삶의 가치가 대수롭지 않게 외면 받아왔기 때문일 겁니다.
5시 뉴스
박종욱

[스트레이트] [헌법재판관의 무게] 어른을 따라,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스트레이트] [헌법재판관의 무게] 어른을 따라,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입력 2025-04-27 21:06 |
수정 2025-04-2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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